[영화] 500일의 썸머

Posted 2010. 1. 27. 02:57, Filed under: 끄적끄적 후기


지난주 토요일에 송반장과 영화 <500일의 섬머>를 봤다.
원래 로맨스 영화를 영화관에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인데
"오랜만인데 영화나 한 편 볼래요?" 하는 제안을 받고 보니
함께 볼 만한 영화가 없는 것이었다.
<전우치>도 봤고 <아바타>도 봤는데다,
이상하게 <주유소 습격사건 2>나 <용서는 없다> 같은 평소 좋아하는 액션 스릴러물도 썩 땡기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동생을 통해
두 영화가 별로래~ 하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관계자가 들으면 이럴 수가 할지라도
돈 주고 일부러 시간 내서 보는 영화다 보니
이런 말을 전혀 무시하게 되지가 않는 걸 어쩌나....)

어쨌든 약간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에
다소 감성적인 영화를 좋아하는 이 후배의 영화 취향을 아는 데다
영화에 나오는 OST들이 궁금하던 차라 자연스럽게 <500일의 섬머>로 낙찰을 봤다.

다행히도 우.리.는.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다. ^^
애시당초 이 영화가 흔하고 흔한 해피엔딩 결말의 로맨스가 아님을 알고서 본 덕인지도 모르겠다.
사건이 터지고 한바탕 소동극이 벌어지는 로맨틱 코미디가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이럴 땐 영화 잡지가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나 다를까.
좌석에서 일어나는데 옆자리 커플 중 여자가 "나 잤어." 그러는 거다. ^^;;

겨울에 주말에 방학에...
이래저래 함께 볼 영화를 찾는 남녀들이 있을 것 같은데
내 생각엔 커플이 보기엔 영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싱글남녀나
이제 막 연인과 헤어진 사람들이 보기에 좋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시작되는 영화의 초반부는
주인공 두 남녀의 운명적인 만남이 얼마나 기막히고 또 기막힌 일인지를
성장 과정을 대비시키며 생동감 넘치고 아름답게 보여주지만
이내 영화는 이별을 통고받은 한 남자의 처절한 발악으로 끝을 보여준다.
그리고 500일 동안 한 남자가 어떻게 여자를 만나 운명을 꿈꾸고 사랑을 꿈꾸는지
시간이 흐르면서 무엇을 불안해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그가 그토록 믿고 싶었던 사랑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까발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한다.
"운명적인 사랑이 있다."고.
여자는 남자에게 대답한다.
"사랑은 모두 착각일 뿐이라고."
여자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착각하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바쳐 여자를 사랑하지만
착각이라고 대답한 여자는 그저 연애를 즐길 뿐이다.
그리고 그 즐기던 연애가 싫증났을 때 홀연히 떠나버린다.

재미있는 건 다시 만난 두 사람이 이번엔 서로 상반되는 말을 나눈다는 거다.
남자는 말한다. "네가 옳았어. 운명적인 사랑따위는 없어."
여자는 말한다.
"그렇지 않아. 운명이 아니라면 내가 어떻게 지금의 남편을 만났겠니?
다만 내가 네 반쪽이 아니었을 뿐이야."

두 남녀가 주고받는 대사에서 영화의 메시지를 찾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남자의 말이 맞고 여자의 말이 틀렸다든가 하는 그런 진위 가리기는 별의미가 없으니까.
그보다는 영화의 마지막에 남자가 새로운 사랑을 위해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영화의 마지막엔 수많은 우연과 운명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우연이야말로 이 우주가 빚어내는 가장 신비롭고 놀라운 기적이라고도 했다.
우연과 운명.
주인공 톰은 그래서 행동한다.
더이상 운명을 믿지 않기에
수많은 우연 중 일부를 자신의 운명으로 만들기 위해.
그전에 섬머를 대할 때엔 그저 이것이 운명이라면 모든 것이 다 한 방향으로 흘러가겠거니...하고
마냥 소극적이었던 그가
길을 내기 위해 여자에게 "커피 한잔 하겠느냐?"고 뻔히 보이는 데이트 신청을 하는 것이다.

굳이 이것이 남녀간의 사랑만 두고 할 얘기는 아니다 싶다.
누구나 '운명'이라는 것에 결말을 맡기려 하면서 스스로의 태만을 합리화시킨 적이 있을 테니까.
나 역시 돌아보면 얼마나 많이 그래왔는지.
인간관계에서든 일에서든 무엇인가 내가 길을 내려고 적극적이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실패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라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용기라는 생각이 든다.

로맨스 영화인데도 정작 로맨스에 대한 생각보다는 인생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했으니
이 영화가 어찌 지금 한창 콩깍지가 씐 남녀에게 맞을까.
그들은 아직 서로가 서로의 운명이라 믿고 싶을 터인데.
그런데 지금도 불현듯 이런 의문이 든다.
"나의 반쪽"이라는 말.
그 말은 평생 유효한 것일까?
그 반쪽 때문에 겪는 불행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PS_ 영화 속 주인공으로 나온 조셉 고든 래빗이 은근히 매력있다. 
       남자 주인공이 별로라고 한다는데, 내 눈에는 소심하고도 따뜻하고 다소 소년 같은 기운도 풍기는 
       그 배우가 괜찮아 보이네?
       어깨가 좁아서 내 스타일이 아니어야 하는데.. 뭔가 이.상.해..흠..........
Response : ,

2008 가을엔가 영화 잡지에 
영화 <300>의 잭 스나이더 감독이 다시 코믹북 <왓치맨>을 영화로 제작 중이라고 기사가 났었다.
그때 <왓치맨>에 대한 인물과 내용 소개를 보고 꼭 보리라 다짐, 다짐했던 영화.
왜 그토록 보고 싶어했는지는 이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기존의 액션 히어로물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과
내가 꽤 좋아할 만한 내용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단순히 악을 무찌르는 그런 구도의 히어로물이 아니라
어떤 사회상이나 인간 군상을 보여주리라는 기대감도 있었던 것 같고.

어쨌든 작년 이맘때 개봉했던 영화 <왓치맨>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진짜 짜증났던 <슈퍼맨 리턴즈>나
애들 장난 같았던 <판타스틱 4>와는 차원이 다른 히어로물.

그런데 막상 작년에 본 영화들을 죽 정리하다 보니
안타깝게도 당시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감흥이 어떤 것들이었는지
머릿속에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ㅠ.ㅠ
보고 나서 흥분했던 사실과
영화 속 캐릭터와 대략적인 줄거리만 기억하고 있을 뿐
왜 무엇이 그토록 매력적이었는지 당췌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다.
영화를 다시 볼 수도 있겠지만, 영화의 원작을 보면
영화 속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시대 상황까지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결국 이번에 <왓치맨> 만화를 구입했다.



두 권짜리 도서인데 권당 14000원이나 한다.
하지만 종이질이 흰색 모조지에 올칼라인 만큼 소장해두기엔 괜찮은 책.
(누런 만화용지들은 너무 쉽게 변색하고 닳는다.)

게다가 칸마다 빼곡하니 들어찬 깨알 같은 말들이
하나하나 곱씹을 만한 것들이어서
음미하고 생각하면서 읽으면 제법 시간도 걸린다.
가령 두 남녀가 사랑을 나누려는 장면에서도
마침TV에 나오는 말들이 칸마다 제시되고
신문장수와 잡지를 읽는 소년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에도
잡지 속 만화의 대사가 제시되는데
이것들이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게 아니라 연관성과 암시를 지니고 있다.
이런 것들은 영화에서는 음미할 수 없었던 것들이라 또다른 즐거움이 있다.



하나의 챕터가 끝날 때마다 극중 인물이 쓴 책에서 발췌했다는 내용의 글들이 몇 페이지씩 나온다.
이 부분을 읽음으로써 히어로들이 활약하기 시작하던 1930년대부터
이야기의 현재인 1980년대까지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영화에서는 이 부분의 처리가 가장 어려웠을 것 같다.
퇴역한 히어로인 홀리스의 관점에서 쓰여진 이 부분을
감독은 앞부분에서 옛 앨범 사진을 넘기듯이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들이 각자 어떤 마음으로 히어로가 되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히어로들이 시대에 따라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비쳐지는지,
또 히어로들 간의 생각의 차이와 능력이 차이에서 오는 자괴감 같은 게 잘 드러나 있다.

영화를 볼 때엔 몰랐는데
이 책에는 평범한 인간이 코스튬을 입고 활약하는 히어로들을 가리며 '코스튬 히어로'라고 부르고 있다.
이에 반해 정말로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영화 속에서는 닥터 맨해튼이나 오지맨디아스)은
슈퍼 히어로라고 부른다.
즉, 배트맨이나 아이언맨은 코스튬 히어로이고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은 슈퍼 히어로인 거다.

어쨌거나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며 재미있게 읽고 있다.
또 영화에 표현되지 못한 상황이나 인물의 심리도 세밀히 드러나서 만족스럽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역시 미국 만화 풍의 그림!!!
일본 만화에 익숙한나에겐 진짜 이런 리얼리티가 적응이 안된다... ㅠ.ㅠ
게다가 저 노란 머리 캐릭터.
영화에선 꽃미남 뺨치게 잘생기고 젊은 오지맨디아스(바이트)인데
만화 속에선 버터 냄새 팍팍 풍기는 중년 아저씨.
그리고 영화 속에서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로어셰크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제일 아쉽다.

이 책을 다 읽으면
영화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
Response : ,

어쩐지 요즘 극장가가 뜨겁게 들끓고 있다.
항상 이맘때면 뭔가 한 건을 올리는 영화들이 나오는 것 같기는 한데
요즘처럼 두 영화가 단시간에 기록을 갈아치우며
거세게 입김을 내뿜은 적은 없었던 듯.
돌아가는 품새를 보니
왠지 '아바타 VS 전우치'의 대결 구도처럼 부추기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
하필이면 이게 외화와 한화라서 그런지
TV매체에서는 은근히 '전우치'를 열심히 띄워주는 느낌도 든다.

다행히 동생 덕분에 크리스마스날에는 '아바타'와 '셜록 홈즈'를 연달아 보는 특혜를 누렸고
(그것도 왕십리 CGV에서 3D로)
신정 연휴에는 '전우치'도 보는 무지막지한 은혜를 입었다. >0<
'터미네이터' 이후로 제임스 카메론의 팬이 된 만큼 그가 연출한 영화를 놓치기도 싫었고
김윤석의 팬이 된 만큼 '전우치'도 보고 싶었는데
두 편을 모두 보는 기회를 얻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사실 아바타는 제임스 카메론 연출이라는 것 하나만 믿고 보고자 했던 영화였다.
엄청난 아바타의 세계를 3D로 구현해낸 놀라운 작품..어쩌고 저쩌고 해도
한번도 3D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전혀 실감나지 않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게다가 전체적인 스토리가 누구말마따나 '포카혼타스'같은 느낌이 팍팍 풍기는 이야기라서
매력적이지도 않았다.
예전부터 백인 남자와 원주민 처녀 간의 사랑 이야기는 엄청 싫어한다.
어쩐지 그런 구도를 보고 있으면 역겹다는 기분이 드는데, 뭐랄까....
인디언 남자들을 거세해버리고
그 위에 더 강한 백인 남자들을 대체시켜 원주민 여자들을 정복함으로써
교묘하게 자신들의 정복 사실을 남녀의 사랑으로 은폐하려는 듯한 기분이 든달까?
자신들의 죄를 사랑으로 아름답게 포장하는 기분도 들고
인디언들의 정신을 숭배하는 척하면서 그들의 정신을 자신들이 계승한 양 구는 것처럼도 보이고,
유치하고 힘없는 용사로 전락하는 인디언 전사들의 모습이 괴롭기도 한 탓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런 기분은 그 옛날 '라스트 모히칸'이라는 영화를 봤을 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어린 시절에 본 인디언들은 항상 악역이었고 야만스러웠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영화 속 인디언이 달라졌다.
그들은 멋지고 훌륭한 전사로써 당당하게 자신들의 비극적 운명을 맞아들이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흐르더니 이번에는 그 인디언 용사들의 자리를 백인 남자들이 차지하기 시작한 것.
'라스트 모히칸'의 모히칸은 백인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였고
정작 진짜 마지막 모히칸은 어딘지 유치한 경쟁심을 불태우는 그런 인물로 그려졌었다.
(난 지금도 왜 그 영화가 그토록 당시에 칭찬이 자자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야기가 좀 이상한데로 흘렀지만,
사실 제임스 카메론이 연출한 '아바타'도 이 구조에서 별로 벗어나지는 않는다.
인디언으로 대체될 수 있는 나비족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백인 남자.
그는 그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의 정신과 그들이 사는 세계에 점차 매료된다.
그러나 ''아바타'가 앞서 나온 영화들보다 진일보한 점이 있다면
그가 다름아닌 장애인이라는 것이다.
즉, 그는 인간 세계(즉, 백인들의 세계)에서는 참으로 나약하고 별볼일없는 존재라는 걸 의미한다.
한때 잘나가는 해병이었으나
사고로 두 다리를 못쓰게 된 남자.
교통사고로 죽은 형 대신 아바타를 조종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라는 점을 빼면
그의 인생은 쓸모없는 취급을 받는 비참한 인생일 뿐이다.
그는 실제로 현실 속에서 꽤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비쳐진다.

나는 그가 건강한 아바타의 몸뚱아리로 딛고 섰을 때의 미칠 듯한 감흥을 표현한
제임스 카메론의 연출을 높이 산다.
장애의 굴레를 벗어나 새롭게 얻은 육체.
새 육체를 통해서 그는 포기했던 행복, 잊고 있었던 신체의 자유,
 그로 인해 엔돌핀이 솟구치는 무한행복에 취할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신체 자유로운 인간 남자였다면?
매력적이고 멋진 그런 남자였다면 그는 나비족 여인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지도
아니, 애시당초 그토록 오랫동안 아바타 세계에 남아있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한시바삐 성과를 이루고 신체와 정신이 온전하게 자유로운 현실 세계로 돌아와
더 아름다운(눈에 익은 외모인 같은 종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이 정상) 애인의 품에 안기려 했을 것이다.

내 눈에 주인공의 선택은 사랑의 결과라기보다는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비쳐졌다.
그 덕분에 '아바타'는 멋진 백인 남자가 인디언 여자를 사랑하고 인디언화한다는
구토나올 것 같은 설정을 살짝 비껴가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영화를 바라본다면 낭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현실적인 이익과 계산만이 행동의 원인으로 남는다.
그래서 감독은 초콜릿처럼 사랑을 입히고 그 위에 영웅의 전설을 끌어다붙인 게 아닐까?

하지만...
솔직히 내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기적인 면, 계산적인 면이다.
인간은 이타적이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이기적인 것이므로.
인간의 육체를 버리고 아바타의 신체를 택하는 것은 그에게 희생이 아니다.
그는 건강한 신채로 새로 태어나 부활하는 것이다.
물론 영화 속에서는 그가 지구로 귀환할 수 없기 때문에 곧 죽을 운몀에 놓여
어쩔 수 없이 아바타의 신체를 갖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좀더 솔직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그는 병든 자신의 육체와 함께하기보다 아바타의 건강한 신체로 대지를 뛰어다니며 행복해했으니.

문득 작년에 본 영화 '디스트릭트 나인'의 주인공이 생각난다.
그는 건강한 육체를 지닌 평범한 남자였다.
결단력이 부족하고 소심하고 
권력을 가진 장인 앞에서 꼼짝을 못하는 남자.
힘없는 외계인 앞에서는 권력을 행사하면서
적당히 인정도 베푸는 선인도 아닌 악인도 아닌 그냥 보통의 사람.
그는 '아바타'의 주인공처럼 스스로 운명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다.
마음은 인간이지만 몸은 외계인이 되어버린 남자는 쓰레기와 먹다 남은 통조림을 뒤지며
한때 인간으로 살던 시절의 아내가 그리워 눈물을 흘린다.
인간으로도 외계인으로도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주인공은 과연 어느 편에 서야 할까.

역시 '아바타'는 3시간이라는 시간에 비해 스토리텔링이 단순하고 진부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카메론 감독의 연출력인 듯.
특히 3D라는 입체 영상은 영화를 보는 내내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바타 2'를 만들 거라고 하니
이제 더이상 포카혼타스식 이야기는 나오지 않으리라 기대해본다.
'터미네이터'보다 '터미네이터 2'가 더 강렬하고 짜릿했던 것처럼
'아바타 2'에서 그가 보여줄 세계관은 좀더 진일보한 것이었으면 싶다.
그가 보여준 입체 영상의 놀라움만큼이나!!

뱀발 : '전우치' 후기도 함께 올릴 계획이었는데 압'아바타'에 너무 올인했다. 이런~~
Respons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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