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꾸리꾸리하다.
이런 날일수록 따끈한 차 한잔 생각이 더 난다.
오늘 고른 녀석은 호야님이 보내주신 루피시아의 다즐링.
어제는 오랜만에 벳쥬만 앤 바통의 다즐링을 마셨었는데
두 녀석은 과연 어떤 맛의 차이가 있을까 비교해보고 싶었기 때문.
노릇노릇 골드 팁이 제법 많이 섞여 있었다.
벳쥬만의 다즐링보다 더 골드팁이 많고, 잎은 더 큰 편이다.
찻잎의 양이 2그램이 조금 넘을 듯해서
물은 200밀리 정도만 붓고 티포원에 3분을 우렸다.
뜨거운 물을 붓는 순간 떫은 향이 올라와서 조금 긴장....;;
티포원은 잔을 따로 찾지 않아서 편한데
잔 바꿔 마시는 재미에 살다 보니
오히려 찾아 쓰기가 귀찮아서 구석에 처박혀 있게 된다.
근데..... 어째 색이 밍밍한 보리차에 가까운 색이 나왔다.
홍차라는 이름에 맞는 아리따운 붉은빛은 어디로????;;;
어쨌든 향을 맡아 봤다.
벳쥬만과는 다른 향이 피어오른다.
벳쥬만의 다즐링 향이 가향차를 떠올릴 만큼 상큼하고 감각적이라면
루피시아의 다즐링은 부드럽고 쿠키 향을 연상시키는 고소함이 느껴진다.
맛에서도 차이가 났다.
벳쥬만 쪽이 더 진하고 혀에 닿는 감칠맛이 있달까?
확실히 클래식티도 루피시아는 밝고 가볍다.
왜 항상 루피시아 차의 안내서에 물을 110~120밀리만 붓고 우리라는지 알 것 같다.
그럼 차 200밀리 마시려면 찻잎을 5g이나 넣어야 한단 말인가!!!
뭐... 이 맛도 좋으니 난 계속 내멋대로 마시련다 결심...;;;
이게 바로 어제 마셨던 벳쥬만 앤 바통의 다즐링.
색깔 면에서도
향기 면에서도
루피시아보다 더 후한 평점을 주고 싶은 차.
사실 아직까지 벳쥬만보다 더 맛있다고 생각되는 다즐링은 마셔보지 못했다.
그래도.. 점점 다즐링이 좋아진다.
오래도록 마셔봐야 그 인상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이제 어렴풋이 다즐링의 실루엣이 잡히는 그런 기분이랄까?
자, 앞으로 또 어떤 다즐링을 만나게 될까? ^^
영화관에 상영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보고 싶던 영화였다.
원래 다큐멘터리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극장판 다큐는 TV판보다 영상미와 절제미가 뛰어나서 감동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다큐멘터리는 함께 보러 갈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 보니
어느새 보러 갈 기회를 놓쳐버렸다. ㅜ.ㅡ
"보고 싶은 건 극장에서 본다"가 내 신념이지만
어쩔 수 없이 동생 PMP로 보게 되었다.
극장에서는 장동건이 내레이션을 맡아서 했는데 이게 별로였는지 말들이 많았다.
내레이션이 거슬려서 몰입을 방해했다고도 하고,
화질이 좋지 않아서 극장서 보기 아깝다는 말도 있었다.
그래서 한편으로, 극장 가서 안 보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화에 대해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을 말하자면,
과연 지구라는 곳이 재미있게 보여져야 하는 곳일까?
라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재밌고 유쾌하고 싶다면
해피 엔딩 결말의 유쾌한 동물 영화를 한 편 보는 게 낫다.
그 속에는 허구와 이상의 세계를 보고 싶은 욕망이 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는 그게 아니다.
이상을 촉구하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자는 목소리를 담는 게 다큐멘터리다.
개를 사랑하는 인간과,
인간을 사랑하는 개가 서로 만나 알콩달콩 행복하게 사는 건
카메라 밖의 개들을 잘라버린 채 해피엔딩을 꿈꾸는 드라마다.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인간과 함께하는 행복한 개도 보여주면서
기르다가 버려져서 동물보호소에 끌려가 안락사당하고,
보신탕용으로 사육되는 개의 비참함을 같이 보여주는 건 다큐멘터리다.
진실은 결코 재미있을 수가 없고
이렇게나 불편한 것이다.
편하지 말자고,
주위의 불편한 진실에서 눈돌리지 말자고 제작하는 것이 다큐멘터리다.
아름다운 지구.
맞다.
사랑스럽고 귀여운 동물들.
맞다.
그러나 지구는 아름답기만 한 것도 아니고,
동물은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형이 아니다.
지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속에서 모든 동식물들은 매순간마다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살고 있다.
여기에 인간으로 인한 환경 파괴까지 더해지면서
이제는 종의 멸절이 예상되는 지점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구>의 이야기다.
엄마곰과 아기곰.
<지구>의 시작은 북극의 밤이 끝나고 낮이 찾아오는 계절부터 시작된다.
겨울을 나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아기곰 두 마리를 기른 엄마곰은
한시바삐 바닷가로 아기곰들을 데려가야 한다.
하지만 아기곰들과 엄마곰은 알지 못한다.
해마다 북극의 얼음이 점점 더 빨리 녹기 시작하다는 사실을.
북극곰은 육지가 있어야만 사냥을 할 수 있는 동물이다.
바다표범처럼 물 속 사냥을 할 수 없다.
오랫동안 바다를 헤엄칠 수도 없다.
그러니 얼음이 녹기 전에 빨리 바닷가로 가서 사냥을 해야만
몇 달 동안 굶주렸던 배를 채울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세상은 넓다>라는 프로그램이었다면
이것은 여행을 갈망하게 만드는 대장관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하지만 <지구>는 이것이 물의 전쟁임을 이야기한다.
지구라는 행성에 생명을 싹 틔운 물.
생명을 기르는 물.
물을 따라 생명은 모여들고
물이 없어서 죽어간다.
석양의 노를을 받아 아름답게만 보이는 이 광경도
사실은 살풍경한 물의 전쟁이다.
아니, 살기 위한 전쟁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가뭄기에 물을 찾아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는 코끼리들이
빗물 모아놓은 것처럼 자그마한 웅덩이에서 쉬고 있는 것이다
코끼리들 주위에는 굶주린 사자들이 포진하고 있다.
낮은 코끼리들의 세상이지만
밤이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자들은 밤을 기다려 코끼리 떼를 공격한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새끼 코끼리지만
이것이 여의치 않자, 결국 무리에서 어미를 떼내어 공격한다.
다큐멘터리가 가슴 아픈 것은
자연에는 '선'도 없고 '악'도 없기 때문이다.
미친 듯이 달리지 않으면 죽는다.
영양은 치타보다 빨라야 하고,
치타는 영양보다 빨라야 한다.
편 가르기에 익숙한 인간의 사고로 바라보기엔 너무도 혼란스럽고 안타깝다.
그렇지만 숭고하다.
그들은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한다.
코끼리들은 바싹 마른 대지 위를 수 개월 간 이동한다.
인간이 만든 농장과 울타리로 그들의 목적지까지 가는 길이 더 멀어졌지만
그래도 가야만 한다.
거센 기류와 태풍에 휩싸여 목숨을 잃더라도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따뜻한 남쪽 나라 인도로 간다.
따뜻한 적도 지방에서 새끼를 낳은 혹등고래도
플랑크톤이 많아지는 남극의 여름을 찾아
수개월을 굶주려 가며 지구 반대편으로 여행을 떠난다.
때로는 무리와 떨어져 모래 폭풍 속을 홀로 헤매야 할 때도 있고
엉뚱한 곳을 헤매다가 지쳐서 죽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비가 내리고
그들이 목적하는 곳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온몸으로 삶을 만끽한다.
죽음이 있기에 생은 밝게 빛난다.
축제와 유희도
인내의 세월 끝에서 더 환한 불꽃을 터뜨린다.
하지만 지구에는 저마다의 치열한 삶이 문제가 아니라
종의 치열한 사투가 찾아왔다.
남극의 여름이 짧아졌다.
북극처럼 남극도 녹고 있다.
펭귄들의 서식지가 줄어든다.
혹등고래는 먹을 것도 없는 적도 지방을 향해 떠나는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
얼음이 녹으면서 북극곰은 발 디딜 곳을 잃어간다.
얼음이 깨져 바다로 나온 북극곰은
드넓은 바다를 이리저리 방황한다.
샤냥을 하지 못해 굶주린 데다
육지로 되돌아가는 여정이 너무 힘들어 곰은 지쳐간다.
지쳐버린 북극곰은 바다코끼리를 사냥할 기운도 없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
무리한 사냥을 시도하던 곰은
마침내 삶을 포기한다.
그는 열심히 살았다.
그의 자식들도 그처럼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하루하루 변해가는 환경과의 싸움에 승산이 있을까?
해마다 더 많은 북극곰들이 바다를 헤메다 죽어갈 것이다.
어느 날,
지구에는 인간들만 남아서
먹고 먹히는 그런 세상이 펼쳐지는 건 아닌지...
아니, 그런 세상에선 이미 인간조차 살 수 없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