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도 그렇지만 티팟도 정말 잠자고 있는 것들이 많다.
고이고이 찻장에 모셔진 채, 박스 안에 담긴 채 온기를 채울 날을 기다리는 녀석들....
그런데도 아까워서 차마 꺼내 쓸 수가 없다. OTL

영국 드라마 <셜록 홈즈>에서
박물관에서 근무하는 중국인 여자가 매일매일 티팟 위로 따뜻한 찻물을 붓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그건 마치 티팟 위에 단순한 찻물을 부어주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생명수를 부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동양인이 나의 눈에도 경건함과 성스러움이 느껴졌는데,
제작자인 서양인의 눈에는 또 얼마나 신비롭게 보였을까.
어쟀든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내가 가진 다구들은 세상에 난 제 몫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박제되어 가는 것도 같아 조금 미안하다.
(그래도 아까비....;;)


찻장 안에서 먼지만 쓰고 있던 딜마의 티팟을 몇 년만에 꺼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홍차 접하던 나름 초창기에 가져온 것으로 기억되는 티팟.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티팟은 여전히 저렇게 동글동글한 게 제일 좋다.
그러다 보니 가지고 있는 티팟들이 대부분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다는 문제점이 있다... -_-;;

유난히 배가 부른 스타일의 딜마 티팟은 아주 깨끗한 화이트를 자랑한다.
어찌 보면 마치 하얀 A4 용지 빛깔 같기도 한데
덕분에 배부분에 딜마의 무지개빛 틴들을 연상시키는 저 사각 패턴들이 산뜻하게 살아난다.


뚜껑 절대로 깨뜨리지 말라고 양옆으로 걸쇠가 달려 있다. ^^
그래서 차 따를 때 뚜껑을 꼭 부여잡지 않아도 되지만
이미 습관이 되어서 무조건 뚜껑은 누르고 따름..ㅋㅋ


좀 마음에 안 드는 건 바로 이 심플한 주둥이.
사실 디자인상으로는 티팟의 자태와 아주 잘 어울리는데
이미 학의 부리처럼 날렵하게 빠진 티팟에 익숙해져서 이 티팟 주둥이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요즘은 아무 차든 잡히는 대로 마시자..는 심정으로 차 박스를 뒤지고 있다.
그런 중에 이번에는 호야님이 주셨던 카렐의 체리티가 잡혔다.
봄기운에 설레는 요즘 같은 때에 딱 마시기 좋다 싶어서 개봉 결정~!!


곱디 고운 망사 티백 사이로 자잘한 잎들이 보인다.
부담스럽지 않은 달콤하고 기분 좋은 체리 향기에 마냥 향만 맡고 싶은 심정.
요즘은 상미기한 지난 차만 마시기도 분주해서 카렐이고 뭐고 차 구입은 절대 안 하고 있지만,
불현듯 카렐의 예쁜 틴들이 그리워진다. (카렐은 왜 이렇게 일러스트가 예쁜 거야.)


오늘의 찻잔은 홈스테드의 밀크글라스.
요즘 법랑 못지않게 왜 이리 밀크글라스가 좋은지 모르겠다.
질감도, 손에 잡히는 촉감도, 보일락말락한 반투명한 빛깔도 다 마음에 든다.

안에 품은 홍찻물을 살포시 내비치는 자태에서
하얀 커튼 뒤에 실루엣을 보는 것 같은 매혹이 느껴진다.


이 잔을 구입한 건 3년쯤 된 것 같다. 
그때엔 옛날 밀크글라스를 재현했다고 해서 호기심 삼아 샀더랬다.
이제 보니 코렐의 버터플라이 티컵이랑 완전히 생김새가 붕어빵이다.
매끄러운 표면 처리나 투명도에서 오히려 옛날 파이렉스보다 우수하지만,
내 눈에는 조금 거친 면이 있는 옛날 잔들도 정감 있어 좋아 보인다.


곶감을 연상시키는 고운 홍찻물.
사진을 한참 찍어대는 동안 많이 식어버렸지만,
향긋한 체리 향과 혀끝에 느껴지는 달콤한 찻물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처음 홍차를 마시던 때에는 단맛이라곤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훗!

잎이 자잘하고 티백 양이 3g은 넘을 듯해서 물은 300밀리 이상 충분히 붓고
2분 정도만 우렸는데 성공한 듯하다.
저 말라비틀어진 초코 스콘만 아니었다면
간만에 여유롭게 격식도 갖추어서 완벽한 티타임이 되었을 것을.... ㅠ.ㅠ
앞으론 과자나 사서 티푸드로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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