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뭘까?.. 몇날 며칠의 고민과 끄적끄적
Posted 2009. 2. 2. 13:07, Filed under: 디 마이나몇주 전(정확히 1월 17일) 본의 아니게 등 떠밀려서
시작(詩作)대회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단순히 국어가 제일 만만한 과목이었다는 이유로 지원한 국문과 학생이다 보니
본인에게 문학적 재능이 없음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시 쓴 게 언제던가..
기억조차 끄집어내기 힘들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흐른 마당에 뜬금없이 시쓰기라니...
새삼 불길, 또 불길하더라니
과연 시제를 받고 나서도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제인즉슨 대략
- 자기 밖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뭐 이런 거였다.
(좀더 운치 있는 문구였는데 그것도 다 까먹음..;;)
백지 위에 이리 끄적 저리 끄적 하기를 무려 한 시간 반.
제대로 된 시상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시쓰기를 수십 년 간 안 한 탓도 있겠고
시를 읽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제일 큰 문제는
'행복'이 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를 않는다는 거였다.
오히려 '행복'에 관해 생각해보려고 눈을 감고 있으니
가슴이 시려와
때아닌 눈물만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이 자리에 모여 머리를 끙끙 싸매며 시를 쓰고 있는 저 사람들은
다들 '행복'한 걸까?
왜 우리는 '행복'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이 '행복'이라는 걸까?
그건 우리의 삶에서 영속성을 지닌 것인가?
역시 나란 인간은
문학형 인간이기보다는 철학형 인간에 가깝다는 것만 뼈저리게 통감했다.
무수히 꼬리를 무는 의문 부호 때문에
도리어 '행복'이 무어냐고 되묻고 싶은 심정이 되었으니 말이다.
'행복'이 무언지 모르는데 '행복'한 척
행복이 내 안에 있는 척 시를 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화장실 창가에 놓인 시클라멘 화분에 행복을 대입시켜
시간에 맞춰 겨우 몇 자 적어내고는
나보다는 다른 이의 행복론에 기대를 가졌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자기 안의 행복을 끄집어냈을까.
몹시 궁금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 어떻게 썼는지 물어보니
대답인즉,
천문 관측을 좋아하는데
밤하늘에 비유해서 썼다고 했다.
"어떻게요?"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고 그녀는 좀더 자세히 대답해줬다.
남편은 태양이고 자신은 그 뒤에서 빛나는 달이 되고 싶단다.
"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자신의 행복이 되는 걸까?
나의 행복을 밖에서 찾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지만
결국 행복이란 타인에게서 구할 수밖에 없는 건가?
미혼인 내게는 당연히 씁쓸한 행복론이었다.
마침내 당선작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과연 무엇이 행복일까.
자기 안에서 길어내는 행복이란 게 도대체 뭘까.
해답이 몹시 궁금했다.
시 두 편, 수필 두 편,
모두 네 편의 발표를 들었다.
하지만 발표된 내용을 모두 듣고 나니
도리어 허탈감만 더할 뿐이었다.
엄마인 그녀들의 행복의 원천은 모두 자식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나 저러나
자기 안에서의 행복 찾기란
결국 '가족'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는 것이란 얘긴가.
* * *
만일 행복이 남편이나 아내, 자식에게서 비롯되는 거라면
이 세상의 모든 미혼남녀는 전부 불행을 짊어지고 살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행복하지는 않은 인간이 되고 만다.
정말 나는 행복하지 않은 인간인가?
다시 한번 자문하면서 돌아본다.
하긴.. 행복에 대한 시 한 편 선뜻 써내지 못한 내가
행복한 인간일 리 없다 싶다.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물어온다면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자신도 없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 관계란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왜 인간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 등등에 대한 기본적인 고민으로 방황하던
10대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매우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사회에 만연한 편가르기 논법으로 자문해본다.
'나는 불행한가?'
그렇게 자문해보니
그렇다고 해서 딱히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어느 책에서 본 것처럼
이만하면 살기 좋은 나라에 태어났고
과보호에 짜증은 나지만 나름 부모님의 사랑도 받으면서 살아왔고
소중한 형제도 있고
대인관계 운도 좋아서 지금까지 좋은 사람,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그러고 보면 상당히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다.
마음이 행복으로 차 있지는 않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행복'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닐까.
'행복해야 한다고', '나는 행복하다고'
그렇게 스스로 주문을 외우고 있는 건 아닐까.
영화에서는 간혹 영속성 있는 행복을 느끼는 존재가 등장한다.
바로 '바보'다.
그 바보들은 타고난 천진함으로
의심할 줄도 모르고
단순한 기쁨에 희희낙락하며 행복해한다.
남들 눈에 자신이 무척 행복하게 보인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그들 속에
인간의 이상인 '행복'이 깃든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결국 '행복'이란 건 비현실적인 개념일 뿐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행복'이란 말을 강조하면 할수록 '불행'을 반추하는 기분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행복하면 좋겠지만,
삶은 행복하기만 한 것도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닌
그저 살아냄 그 자체인 게 아닐까.
그 살아내는 과정 속에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행복의 진짜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뿐인가.
결혼한 사람도 행복하게 살고 싶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행복하게 살고 싶고
이혼한 사람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
결혼한 사람도 불행할 수 있고,
이혼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으니
행복이란 어떤 조건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삶을 열심히 살아내게 하는 그 어떤 지표 같은 게 아닐지.
* * *
일전에는 회사 후배가
또 행복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결혼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이런가 싶기도 하고.
선배처럼 고양이나 동물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말 속에는 '지금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와
'혼자 사는 건 불행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담겨 있다.
아울러 "동물이든 사람이든 대상을 사랑하면 행복할 것이다"라는 생각도 담겨 있다.
물론 사랑하면 행복하다.
나 역시 울 집 곤냥 마마님만 보면 하루의 피로와 근심을 뒤로 접어둔 채
코를 처박고 부비부비하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행복감과 행복은 또 다르지... 싶은 거다.
곤냥 마마님이 나를 행복감에 젖게 해주지만
단지 그 사실 하나로 '내 인생은 행복해'라고 외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
내가 열정을 쏟는 대상으로 인한 행복이 '영원한 행복'인 것은 아니다.
삶이란 하루 24시간 안에도 무수한 일들과 감정의 기복이 뒤따른다.
그 24시간,
나아가 한 달, 일 년, 그리고 평생을
오로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행복감만으로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뜨거운 열정은 사그라들게 마련이고
세월이 지났을 때 상대의 온기에 감사하며 살 수만 있어도 축복이다.
품에 안고 젖을 물려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던 아기는
자라서 성인이 되어 엄마의 어깨에 더한 짐을 올려놓고
부모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죽을 때까지 행복하다, 라는 건 위선이다.
반려동물은 조로병에 걸린 자식과 같아서
짧고 빛나는 순간을 함께하는 대신
가슴속에 평생 짊어져야 할 묘비를 세우고 곁을 떠난다.
인생은 행복했기 때문에 더욱 슬프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것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니 행복은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동물이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
게으르고 무능한 남편을 만나 애를 태울 수도 있고
남편 맘을 손톱만큼도 헤아리지 못하는 마누라를 만나 볶이며 살 수도 있다.
순진무구했던 아이가 나쁜 짓만 골라 하는 골칫거리가 되어 부모 속을 태울 수도 있고
나처럼 시집을 안 가서 부모의 한숨거리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죽지 않을 바에야 이렇든 저렇든 살아내야 하고
이왕 살아갈 것이면 행복하려고 애쓸 뿐이다.
영원한 행복은 없다.
아니 말을 바꾸어야겠다.
영속적인 행복감이란 건 없다.
오늘의 행복과 기쁨으로 인해 내일은 더욱 슬퍼하고 비참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중요한 건 '행복'을 찾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
그건 '평생토록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행복의 주체가 외부에 있지 않고
자신에 대한 사랑에 있다면 그건 고난을 견디는 힘이 된다.
지금 힘든 나,
지금 당장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나,
그럼에도 살아내고 있는 나,
살아보려고 애쓰는 나.
이런 나를 연민하고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온갖 행복의 대상을 찾아 헤메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로 생각된다.
그래서였나?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은.
산다는 건 행복찾기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감싸안는 과정이라는 걸
이래저래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눈 끝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 * *
결혼한 친구가 헤어지는 끝에 말했다.
"어서 결혼해.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구나?"
친구는 그제서야 말을 잘못했다고 생각한 듯 말을 바꿨다.
"그게 아니라..."
나는 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가 느끼는 행복감은 나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
그 친구가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은 행복에 취하면
온 세상이 다 핑크빛으로 보이고
타인에게도 같은 행복을 맛보기를 권한다.
하지만 그 친구는 신혼 초에 시댁 때문에 힘들어했을 때
같은 이유로 내게 결혼하지 말라고 했더랬다.
행복이 뭘까?
결국 열심히 사는 것, 그뿐이 아닐까?
늘 행복감에 젖지는 않더라도
행복감에 젖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나 자신을 소중히 한다면
그래서 후회없이 살았노라 말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닐까 싶다.
행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그대가 있어서 행복했노라가 아니라
그대를 사랑하는 내가 있어서 행복했노라.
이것이 행복의 참얼굴이지 싶다.
시작(詩作)대회에 참여한 일이 있었다.
단순히 국어가 제일 만만한 과목이었다는 이유로 지원한 국문과 학생이다 보니
본인에게 문학적 재능이 없음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시 쓴 게 언제던가..
기억조차 끄집어내기 힘들 정도로 오랜 세월이 흐른 마당에 뜬금없이 시쓰기라니...
새삼 불길, 또 불길하더라니
과연 시제를 받고 나서도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시제인즉슨 대략
- 자기 밖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뭐 이런 거였다.
(좀더 운치 있는 문구였는데 그것도 다 까먹음..;;)
백지 위에 이리 끄적 저리 끄적 하기를 무려 한 시간 반.
제대로 된 시상 하나 떠오르지 않았다.
시쓰기를 수십 년 간 안 한 탓도 있겠고
시를 읽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제일 큰 문제는
'행복'이 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를 않는다는 거였다.
오히려 '행복'에 관해 생각해보려고 눈을 감고 있으니
가슴이 시려와
때아닌 눈물만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이 자리에 모여 머리를 끙끙 싸매며 시를 쓰고 있는 저 사람들은
다들 '행복'한 걸까?
왜 우리는 '행복'해야 하는 걸까?
도대체 무엇이 '행복'이라는 걸까?
그건 우리의 삶에서 영속성을 지닌 것인가?
역시 나란 인간은
문학형 인간이기보다는 철학형 인간에 가깝다는 것만 뼈저리게 통감했다.
무수히 꼬리를 무는 의문 부호 때문에
도리어 '행복'이 무어냐고 되묻고 싶은 심정이 되었으니 말이다.
'행복'이 무언지 모르는데 '행복'한 척
행복이 내 안에 있는 척 시를 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화장실 창가에 놓인 시클라멘 화분에 행복을 대입시켜
시간에 맞춰 겨우 몇 자 적어내고는
나보다는 다른 이의 행복론에 기대를 가졌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자기 안의 행복을 끄집어냈을까.
몹시 궁금했다.
식사를 하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이에게 어떻게 썼는지 물어보니
대답인즉,
천문 관측을 좋아하는데
밤하늘에 비유해서 썼다고 했다.
"어떻게요?"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고 그녀는 좀더 자세히 대답해줬다.
남편은 태양이고 자신은 그 뒤에서 빛나는 달이 되고 싶단다.
"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게 자신의 행복이 되는 걸까?
나의 행복을 밖에서 찾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지만
결국 행복이란 타인에게서 구할 수밖에 없는 건가?
미혼인 내게는 당연히 씁쓸한 행복론이었다.
마침내 당선작 발표 시간이 다가왔다.
과연 무엇이 행복일까.
자기 안에서 길어내는 행복이란 게 도대체 뭘까.
해답이 몹시 궁금했다.
시 두 편, 수필 두 편,
모두 네 편의 발표를 들었다.
하지만 발표된 내용을 모두 듣고 나니
도리어 허탈감만 더할 뿐이었다.
엄마인 그녀들의 행복의 원천은 모두 자식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나 저러나
자기 안에서의 행복 찾기란
결국 '가족'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는 것이란 얘긴가.
* * *
만일 행복이 남편이나 아내, 자식에게서 비롯되는 거라면
이 세상의 모든 미혼남녀는 전부 불행을 짊어지고 살고 있거나
아니면 최소한 행복하지는 않은 인간이 되고 만다.
정말 나는 행복하지 않은 인간인가?
다시 한번 자문하면서 돌아본다.
하긴.. 행복에 대한 시 한 편 선뜻 써내지 못한 내가
행복한 인간일 리 없다 싶다.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물어온다면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자신도 없다.
'산다는 게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 관계란 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왜 인간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가? 등등에 대한 기본적인 고민으로 방황하던
10대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매우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아온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사회에 만연한 편가르기 논법으로 자문해본다.
'나는 불행한가?'
그렇게 자문해보니
그렇다고 해서 딱히 불행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어느 책에서 본 것처럼
이만하면 살기 좋은 나라에 태어났고
과보호에 짜증은 나지만 나름 부모님의 사랑도 받으면서 살아왔고
소중한 형제도 있고
대인관계 운도 좋아서 지금까지 좋은 사람, 좋은 친구들도 많이 만났다.
그러고 보면 상당히 행복한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도 이상한 일이다.
마음이 행복으로 차 있지는 않으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행복'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닐까.
'행복해야 한다고', '나는 행복하다고'
그렇게 스스로 주문을 외우고 있는 건 아닐까.
영화에서는 간혹 영속성 있는 행복을 느끼는 존재가 등장한다.
바로 '바보'다.
그 바보들은 타고난 천진함으로
의심할 줄도 모르고
단순한 기쁨에 희희낙락하며 행복해한다.
남들 눈에 자신이 무척 행복하게 보인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그들 속에
인간의 이상인 '행복'이 깃든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결국 '행복'이란 건 비현실적인 개념일 뿐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행복'이란 말을 강조하면 할수록 '불행'을 반추하는 기분이 드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행복하면 좋겠지만,
삶은 행복하기만 한 것도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닌
그저 살아냄 그 자체인 게 아닐까.
그 살아내는 과정 속에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 행복의 진짜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건 나뿐인가.
결혼한 사람도 행복하게 살고 싶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행복하게 살고 싶고
이혼한 사람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
결혼한 사람도 불행할 수 있고,
이혼한 사람이 행복할 수 있으니
행복이란 어떤 조건에서 생겨나는 게 아니라
삶을 열심히 살아내게 하는 그 어떤 지표 같은 게 아닐지.
* * *
일전에는 회사 후배가
또 행복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지금 내가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결혼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이런가 싶기도 하고.
선배처럼 고양이나 동물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말 속에는 '지금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와
'혼자 사는 건 불행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담겨 있다.
아울러 "동물이든 사람이든 대상을 사랑하면 행복할 것이다"라는 생각도 담겨 있다.
물론 사랑하면 행복하다.
나 역시 울 집 곤냥 마마님만 보면 하루의 피로와 근심을 뒤로 접어둔 채
코를 처박고 부비부비하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행복감과 행복은 또 다르지... 싶은 거다.
곤냥 마마님이 나를 행복감에 젖게 해주지만
단지 그 사실 하나로 '내 인생은 행복해'라고 외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
내가 열정을 쏟는 대상으로 인한 행복이 '영원한 행복'인 것은 아니다.
삶이란 하루 24시간 안에도 무수한 일들과 감정의 기복이 뒤따른다.
그 24시간,
나아가 한 달, 일 년, 그리고 평생을
오로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행복감만으로 살아간다는 건 불가능하다.
뜨거운 열정은 사그라들게 마련이고
세월이 지났을 때 상대의 온기에 감사하며 살 수만 있어도 축복이다.
품에 안고 젖을 물려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던 아기는
자라서 성인이 되어 엄마의 어깨에 더한 짐을 올려놓고
부모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죽을 때까지 행복하다, 라는 건 위선이다.
반려동물은 조로병에 걸린 자식과 같아서
짧고 빛나는 순간을 함께하는 대신
가슴속에 평생 짊어져야 할 묘비를 세우고 곁을 떠난다.
인생은 행복했기 때문에 더욱 슬프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것들이 부지기수다.
그러니 행복은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동물이 가져다주는 게 아니다.
게으르고 무능한 남편을 만나 애를 태울 수도 있고
남편 맘을 손톱만큼도 헤아리지 못하는 마누라를 만나 볶이며 살 수도 있다.
순진무구했던 아이가 나쁜 짓만 골라 하는 골칫거리가 되어 부모 속을 태울 수도 있고
나처럼 시집을 안 가서 부모의 한숨거리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죽지 않을 바에야 이렇든 저렇든 살아내야 하고
이왕 살아갈 것이면 행복하려고 애쓸 뿐이다.
영원한 행복은 없다.
아니 말을 바꾸어야겠다.
영속적인 행복감이란 건 없다.
오늘의 행복과 기쁨으로 인해 내일은 더욱 슬퍼하고 비참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중요한 건 '행복'을 찾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남편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동물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
그건 '평생토록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행복의 주체가 외부에 있지 않고
자신에 대한 사랑에 있다면 그건 고난을 견디는 힘이 된다.
지금 힘든 나,
지금 당장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나,
그럼에도 살아내고 있는 나,
살아보려고 애쓰는 나.
이런 나를 연민하고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온갖 행복의 대상을 찾아 헤메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로 생각된다.
그래서였나?
내가 행복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은.
산다는 건 행복찾기 못지않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감싸안는 과정이라는 걸
이래저래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눈 끝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 * *
결혼한 친구가 헤어지는 끝에 말했다.
"어서 결혼해.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구나?"
친구는 그제서야 말을 잘못했다고 생각한 듯 말을 바꿨다.
"그게 아니라..."
나는 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가 느끼는 행복감은 나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해."
그 친구가 내 말을 이해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사람은 행복에 취하면
온 세상이 다 핑크빛으로 보이고
타인에게도 같은 행복을 맛보기를 권한다.
하지만 그 친구는 신혼 초에 시댁 때문에 힘들어했을 때
같은 이유로 내게 결혼하지 말라고 했더랬다.
행복이 뭘까?
결국 열심히 사는 것, 그뿐이 아닐까?
늘 행복감에 젖지는 않더라도
행복감에 젖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나 자신을 소중히 한다면
그래서 후회없이 살았노라 말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행복이 아닐까 싶다.
행복하기 위해 노력했으니까.
그대가 있어서 행복했노라가 아니라
그대를 사랑하는 내가 있어서 행복했노라.
이것이 행복의 참얼굴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