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카페 T42에 대한 감상

Posted 2008. 4. 27. 12:53, Filed under: 디 마이나

종로 뒷골목에 있는 T42(티포투)는 개인적으로 참 의미가 깊은 곳이다.
카페란 으레 커피, 콜라, 사이다, 인스턴트 레몬티 같은 것 정도만 마시는 곳이고,
제아무리 분위기 있는 소파에 고급 인테리어를 했다 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이내 찌든 담뱃내가 배어 꼬리해지는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에게
일종의 컬처 쇼크를 안겨준 곳이었으니까.

그때만 해도 스타벅스나 커피 빈 같은 테이크아웃 커피점은 생각도 못했던 시절이었고,
카페는 언제나 개인이 지하 1층이나 건물 2, 3층에 안락의자를 구비해서
삼삼오오 편안하게 얘기하도록 나름 인테리어에 치장하던 그런 때였다.

물론 내 기억 속에 딱 한 곳 꼬리해지지 않았던 카페가 있다.
그곳은 언젠가 한번은 그 추억의 카페에 대해 (아니, 커피숍이라고 해야 할까?)
조금은 감상적인 기분으로 회상하고 싶은 곳이다.
학교를 졸업하고도 줄곧 만남의 장소였던 그곳이
어느날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소주방으로 변해버렸을 땐
정말이지, 내 삶의 일부분을 잃어버린 것처럼 슬프고 안타까웠다.
(이런.. 이야기가 또 엇나가는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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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 카페가 없어진 이후로
딱히 정해진 한군데의 만남의 장소를 갖지 못하고
이리 전전, 저리 전전.. 하며 친구와 종로 바닥의 온갖 카페를 헤메기를 몇 년은 거듭한 끝에,
TV에 소개된 것을 계기로 T42를 알게 됐다.
처음 데려간 이가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회사 동료였던 것 같은데)
뜻밖에도 그곳은 예전에 "반쥴"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이었던 곳으로
학생 시절 "썰러 가자~"며 무턱대고 들어갔다가
어마어마한 가격에 혼비백산해서 뛰쳐나왔던 그곳이었다.
당시 돈까스가 4~5천원 선이었는데,
그곳의 메뉴판에 적힌 가격은 13000원이었으니...;;
게다가 제대로 복장을 갖춘 중년의 지배인의
숙녀들의 의자를 일일이 빼주는 서비스를 받을 때부터 불안감을 떨치려야 떨칠 수 없던 곳이었다...... -_-;;

학생 시절의 그 부끄럽고도 황당했던 기억이
사회인이 되니 피식 웃음도 나오면서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이번엔 또 어떻게 달라졌길래?? 하면서 따라 들어가니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독특한 인테리어와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으면서도
편안하고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우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생전 보는 이쁜 병들을 조로록 내놓으며 향을 맡고 마음에 드는 차를 고르라고 한다.
메뉴판도 있지만 쳐다보지도 않고
연신 코르크마개를 열어가며 하나하나 향을 맡아보던 신기한 체험에 탄성을 지르고,
처음 구경하는 예쁜 티팟에 차가 하나 가득 부어나오는 후한 인심(?)에 감탄을 연발했다.
사실 차 3그램에 물 400밀리 정도 부어주는 것뿐인데,
늘 인스턴트 커피나 차만 마셔왔으니
당시엔 뭣도 모르고 그 극진한 물 인심에 감동했던 것. ^^;;

그리고, 또 생전 처음 먹어본 차란 또 어떠했던가.
차를 잘 모르다 보니 무조건 달콤한 과일 향이 도는 차에
설탕까지 넣어가며 마시니
순하고 향긋하고 부드럽기 이를 데 없다.
뭐 딱히 짜릿한 쾌감을 주는 커피 같지는 않지만
이야기하는 내내 맹물이 아닌 뭔가를 연신 마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원더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후로 종로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늘 T42로 이끌었는데,
분위기도 분위기고
차도 차지만,
가장 좋았던 건 대부분의 층이 금연이기 때문이었다.
늘 커피숍에 들어서면 숨조차 쉬기 힘든 너구리굴에 들어가는 것 같았는데,
T42는 금연일 뿐 아니라 늘 초를 켜놓아서인지 잡냄새가 나지 않아 좋았다.
문제는 인기가 너무 좋아서 자리가 없다는 거였지만....
그렇게 뒤를 이어 다시금 종로의 지정 장소가 된 T42.
6년도 넘게 나의 단골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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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거듭하고,
유명세를 타서 지하부터 3층까지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이 들끓는 동안
T42도 많은 것들이 변해갔다.
차마다, 고객마다  다르게 나오던 이름있는 도자기 잔들과 티팟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쏠쏠했건만,
어느 순간 그것들은 일제히 자취를 감추고
스텐 뚜껑이 부착된 편리하고 튼튼한 스타일의 모던한 티팟이 똑같이 테이블에 올려졌다.
아기자기하고 예쁜 홍찻잔들 대신
그다지 눈길 가지 않는 평범한 잔들이 자리를 메웠다.
손님이, 혹은 점원이 실수로 깨먹는
잔과 티팟의 비용을 감당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라..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쏴~한 찬바람이 불고 지나갔다.
그땐 그 바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평소 손쉽게 접할 수 없는 비싼 잔과 티팟들을 즐기고픈
귀족적 생활의 동경이 좌절된 데 대한 이기적 아쉬움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초기의 감동과 느낌이 퇴색되어 버렸음에도
종로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또 여전히 T42로 향했다.
그건 슬픈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사랑해서 결혼하는 이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간 만난 사람 중에서 이 사람이 가장 낫기 때문에,
또는 이만한 사람도 앞으로는 만나기 힘들지 몰라서 결혼한다.
이 음식점이 맛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그나마 가장 먹을 만하다거나 달리 갈 곳이 마땅치 않아서 간다.
때로는... 아니 어쩌면 삶의 대부분을,
순수한 목적이나 열망 때문이 아니라
비교하고 선택하는 것에 할애하며 선택의 결과에 만족하는 것으로 채워간다.

T42로 향할 때마다 조금 슬펐던 것은,
더이상 그곳이 내게 열망으로 가득 찬 곳이 아니라,
그 주위에 그만한 곳도 없기 때문에 가는 곳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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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게도 여전히 종로에는 그만한 곳도 없다.
스타벅스 같은 곳은 자꾸자꾸 늘어나지만,
소곤소곤 조곤조곤 아늑한 보금자리를 제공받은 듯한 느낌의 카페는 없다.
그나마 아직도 남아 있는 구닥다리 카페들은
냄새나는 쇼파에 맛없는 커피에,
담배 연기로 찌든 실내에서
구태의연한 장소를 제공하고 돈을 받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또 T42로 갔다.
그런데 왠일로 한 차례 식기들이 새단장을 했다.
혹시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은 것인가... 마음속에 기대가 잠시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새 단장을 했다지만
한꺼번에 일시에 맞춘 듯한 티팟과 세트를 이루는 잔들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똑같은 규격에 똑같은 잔들이다.
한 가지로 맞춰서 고르느라 편했겠군... 생각했다.

게다가 티팟이 무지 커졌다.
예전 티팟이 1인용 용량이었다면
이번엔 2~3인용 600밀리 용량이다.
티팟이 커지면 물도 그만큼 많이 부어야 한다.
물이 많아지면 그만큼 찻잎도 더 많이 넣어야 한다.
티팟이 커진 건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찻잎도 더 넣어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즐링을 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차를 마시는 건지 찻물을 헹구어낸 물을 마시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밍밍하고 맹물맛이 물씬 나는 차가 우려졌다.

이번엔 가슴속에 절망의 회오리가 일고 지나갔다.
홍차와 허브차 전문점이라고 하면서도
차맛조차 신경쓰지 않는 이 찻집에
아직도 그나마 갈 곳이 없다는 이유로 와야 하는 절망감과...
손님이 7000원, 10000원의 돈으로 보일 사람들이 운영하는 가게가 득시글거리는 이 종로 바닥에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손님은 바글댄다는 이유로
앞으로도 T42는 개선의 여지 없이 악화일로를 치달을 거란 암담한 슬픔...

아마 둘 중 하나일 거다.
찻집을 오픈할 당시의 마음이 주판알을 튕기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퇴색되었거나,
애시당초, 외국 차문화에 대한 그럴싸한 흉내는 있었을망정
차에 대한 이해와 사랑 따윈 없었거나.....
어쩐지 후자가 맞을 것만 같아서 더욱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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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페나 찻집에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카페에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남들이 보기에도 참으로 이해 안 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그 옛날, 종로 모퉁이의 커피숍을 떠올리면 알싸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화장실 청결 의식이 전무하던 당시에
최신식이 아님에도 정말 깨끗하고 항상 기분좋은 체리향이 풍겨나오던 그곳의 화장실.
딱히 요란한 치장의 인테리어가 아님에도
아늑하고 유쾌했던 우리들의 보금자리.
한번은 카페에선 절대로 틀어줄 리 없는 메탈 그룹 <Skid Row>의 노래가 나와서
불현듯 고개를 돌려보니
몇 년을 다니면서도 본 적 없던 주인이 직접 나와서 음반을 고르고 있었다.
놀라운 건, 주인장이 빨간 티셔츠 차림의 은발이 새하얀 할아버지였던 것.

이런 거였다.
비록 주인이 손님을 대면하지 않더라도 주인의 마음씀은 종업원을 통해,
나아가 카페의 분위기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 노익장의 삶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열은
한 발 나아가 남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 커피숍을 훈훈하게 채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주인이 종업원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에 따라
종업원은 눈빛만 마주쳐도 따스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도 하고,
로봇처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잘 차린 인형처럼 립서비스와 억지 웃음에 치중하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카페에서 얻고 싶은 것은
단지 종업원의 억지 웃음과 그럴싸한 인테리어가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고 자기 일을 사랑하는
그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의 숨결인지도 모르겠다.
그것 역시 일상에서 접하는 위대한 철학이고 삶의 향기가 아닐까?
그런 이가 경영하는 찻집의 차가
그럴싸하게 잔만 바꾸어 생각없이 맹물차를 내놓을 리는 없지 싶다.

아마 지금쯤은 돌아가셨겠지.
열심히 스포츠카를 닦던 그 주인 할아버지.
아마도 마지막까지 정말 열심히 자신을 사랑하셨을 거란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늘 만남의 장소가 되어온 나의 종로 거리.
점점 갈 곳이 없어진다.
고깃집과 술집은 즐비하고, 몇 달 만 지나도 간판은 뒤바뀐다.
정을 나눌 만한 음식점도, 카페도 없다.
하루에도 엄청난 사람들이 휩쓸고 가는 대도시 한복판은
유행과 종목 바꾸기에 눈이 벌겋다.
당연한 거겠지.
그럼에도 이만한 곳조차 없다는 이유로
앞으로도 T42로 발길을 옮길 내 모습이 떠올라 더욱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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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참으로 긴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랫동안 차분히 글을 쓸 형편이 아니라서
썼다 말다 하면서 몇날 며칠을 썼네요~~
글이 꽤 길어요.
그냥 혼자 상념을 적은 글이라 지루하셨을 것 같은데
끝까지 읽으신 분이 있다면 독서 능력이 뛰어나신 분입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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