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토록 연애라곤 해본 일이 없었던 후배가 뒤늦게 연애를 하면서 힘들어하고 있다.
지난 해의 끄트머리에서
"도대체 남자와 여자는 왜 만나는 걸까요?"라는 뜬금없는 문자를 던지기에
그저 단순히 남자라는 동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하는 정도의 원초적 궁금증인 줄만 알았는데
난생 처음으로 상대방에게 끌리고 있었다.

올해 초만 해도 호기심 반으로 후배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보름 정도 지난 사이에 후배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남의 연애 문제에 이래라 저래라 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는 언제나 내 일이 아닌 문제에 관해서는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자신에게 닥치면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때론 뻔히 알 수 있는 사실조차 보지 못한다.
어쩌면 알면서도 외면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그걸 아니까 상대가 진지하면 진지하고 힘들어하면 힘들어할수록 쉽게 이야기해 줄 수가 없다.
더구나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가름지을 수 있는 일일 때에는
더더욱 섣불리 재단할 수가 없다.
나도 나의 일을 모르는데 남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하지만 후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 가지 느낀 게 있다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여자들이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구나... 하는 거였다.
나쁜 남자,라고 하면 정말 영화 속에서나 볼 법한 그런 남자를 떠올리겠지만
그 정도로 질 나쁜 남자들은 현실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는 나쁜 남자란,
상대방에 대한 배려보다 자기 위주로 행동하는 이기적인 남자들,
그렇게 멋대로 굴면서도 여자에게는 마리아 같은 인내와 모성을 기대하는 남자들,
남자다운 척은 다하면서도 정작 여자더러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덜 자란 남자들... 이랄까?

나라면 워낙 허세 부리는 인간, 자기 멋대로인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에
애시당초 그런 타입에 연애 감정조차 느끼지 않겠지만,
지인들이 이런 문제로 가슴아파하면 뜻밖에도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다.
그저 그들이 고민하는 바를 함께 들어줄 뿐이다.

그런데 왜 내 지인들을 힘들게 하는 그들은 하나같이 비겁한 것일까.
"나는 이런 못난 놈이지만 너를 정말 사랑한다."라고 외칠 용기조차 없는 사람들.
온갖 자존심과 허세로 무장했지만
"난 이런 놈인데 그래도 네가 사랑하길 바란다."고 외친다.
"난 이런 나쁜 놈인데, 네가 나를 잡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자신이 다가서서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도 없으면서
"이런 나를 잡아줘, 이런 나를 사랑해줘"라니, 무슨 떼쓰는 아이 같다.

물론 안다.
그들의 허세가 사실은 그만큼 나약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껍데기라는 것을.
그 틈새의 모습이 때론 불쌍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스스로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한 남자가 변하는 것은 여자에게 달린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마찬가지로 한 여자가 변하는 것 역시 남자가 해줄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변하고 변하지 않고는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를 못 만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하게 됨으로써 스스로 변해야 하는 게 아닐까?
"네가 나를 바꿔 봐, 네가 나를 바로잡아 봐" 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 내가 달라질 거야."로 치환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것이 성숙한 남자, 성숙한 여자가 생각할 일일 것이다.

<시크릿 가든>의 김주원은 길라임에게 주문처럼 "물거품처럼 사라져줘."라는 이기적인 요구를 해대지만
오히려 스스로 물거품이 되겠다며 목숨을 내던진다.
그건 그가 운좋게 그를 구원해줄 성모 같은 여인상 길라임을 만나서가 아니라,
그의 적극적인 사랑이, 바로 그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한 거다.

정말 나쁜 남자는 멋대로인 남자가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의 짐을, 자신의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그런 남자가 바로 나쁜 남자다.
그 점은 나쁜 여자도 역시 마찬가지겠지.

  1. # 지읒 2011.01.27 17:11 신고 Delete Reply

    좋은 글이네요^^

  2. # BlogIcon sylvan 2011.01.30 09:06 신고 Delete Reply

    정말 좋은 글이에요.
    제가 예전에 정말 무릎을 탁 치며 읽었던 글이,
    여자가 남자와 결혼을 생각할 때.
    날 사랑한다면 달라지겠지, 내가 잘하면 달라지겠지라며 남자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나를 화나게 하는 남자의 그 무엇이 평생 변하지 않더라도, 평생 감당할 수 있다면 결혼을 생각하라는 글이었어요.
    어른들의 연애란, 참 어려운 것같아요.
    내심 결혼을 전제로 두기 때문일까요..?

    1. Re: # BlogIcon 꽃띠냥이 2011.01.31 02:10 신고 Delete

      제가 후배에게 해준 말이나 예전 친구에게 해준 말이 바로 그거였어요.
      내가 상대를 구원할 수 있다는 그런 자만은 하지 말라고...
      내가 나도 못 구원하는 형편에 어떻게 남을 구원해요.;;
      그런데 참 어려운 게 한창 좋아하는 거 뻔히 알면서 그런 말 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나모님이야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되지 않나요...^^

  3. # 후배 2011.02.07 02:00 신고 Delete Reply

    '사랑은 행복이다'라고 생각했는데...
    현실 속 사랑은 힘들고 어려운
    그 무엇인 것 같아요.
    선배 말처럼 남친을 만나면서,
    "행복해요"라고 말하기보다는
    "힘들어요"라고만 말했던 것 같아요.
    오늘 많이 울었어요.
    서로 노력하면 행복해지겠지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그게 아님을 깨달았거든요.
    만남이 짧았기에 이별이 쉬울 줄 알았는데
    자꾸 눈물이 나네요ㅠㅠ

    1. Re: # BlogIcon 꽃띠냥이 2011.02.08 01:22 신고 Delete

      토닥토닥...
      괜찮아...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
      머리도 마음도 비우고 돌아와.
      사람 마음이란 게 또 그리 약한 것 같으면서도
      어느샌가 일상으로 적응하고 돌아오더라고.
      가끔씩 상처자리가 다시 아플 때도 있겠지만
      그건 잠깐씩이야.
      그리고 아픈 만큼 생각도 넓히고 깊어질 거야.
      여행 잘 다녀와~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 : 67 : Next »

Recent Posts

  1. [홍차] 오랜만에..정말 오랜만에 립톤 예..
  2. [게임] 베이커리 스토리에 매진중....;;;;
  3. [잡생각]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나, 내가..
  4. 이제는 인형까지도 빈티지풍? ^^;;
  5. [찻잔] 립톤 사각머그와 할센핸리온의..

Recent Comments

  1. Christian Louboutin 가장 Christian Louboutin 2013
  2. 가장 Christian Louboutin Red Bottom Shoes 2013
  3. 가장 Marc Jacobs Bags 2013
  4. 가장 MBT Shoes http://www.clheelsol... MBT Shoes 2013
  5. 한 사람을 잃게 된다는 제일 큰 아쉬움은.. longchamp bags uk 2013

Recent Trackbacks

  1. contactos con mujeres contactos con mujeres 2012
  2. [동물,고양이] 반려동물 고양이와 살아가.. 월풍도원(月風道院) - Delight on the Si.. 2010
  3. [영화,멜로] 욕심을 버려라! 천일의 스캔.. 월풍도원(月風道院) - Delight on the Si.. 2010
  4. [동물,고양이] 반려동물 고양이와 살아가.. 월풍도원(月風道院) - Delight on the Si.. 2010
  5. 흡혈귀는 어떻게 이시대의 완소남이 되었.. 한화데이즈 2010

Calendar

«   2018/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Bookmarks

  1. 기억이란.. 늘 제 멋대로다.
  2. 뭐 사는게 특별한게 있겠냐만은...
  3. 아방+떽뛰+귀염+칠훈
  4. luiisworld
  5. 5월의 작은 선인장
  6. 양철로봇의 사랑이야기
  7. 나무향기
  8. 레몬가게
  9. 깍꿍님 블로그
  10. 카르페 디엠 데이
  11. 은근과 끈기
  12. 종이우산의 앙냥냥 월드
  13. 깅수네집
  14. 토토님 블로그
  15. 고추장에 찍은 멸치

Site Stats

TOTAL 1,295,490 HIT
TODAY 1 HIT
YESTERDAY 69 H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