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실.. 그녀의 죽음 앞에서

Posted 2008. 10. 3. 12:47, Filed under: 디 마이나



연예인들의 자살이 어쩌구저쩌구.. 했어도
사실 그렇게 큰 충격을 느낀 적은 없었다.
몇 해 전, 영화배우 이은주의 자살 소식을 접했을 때나
옥탑방 고양이 때 얼굴을 익혔던 정다빈의 소식을 접했을 때에도
연민에다, 거짓말 보태지 않고 "왜?" 하는 단순한 흥미도 있었다.
더욱이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 내게 안재환의 자살 소식은
그가 정선희의 남편으로밖에 각인되지 않아서인지
내게는 안재환의 죽음이 아니라, 정선희 남편의 자살로 다가왔다.

그런 내가 어제 아침,
최진실의 자살 소식과 뉴스를 접한 이후부터는
내내 마음이 착잡하고 우울하다.
무얼 해도 가슴 한구석에서 그녀의 죽음의 무게가 덜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이은주나 정다빈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똑같은 연예인인데 왜 내게 그녀의 죽음이 더 가슴아프고 편치 않은 것일까.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그녀의 죽음은 내게 스타나 연예인의 죽음이 아니라
여자로서의 그녀의 삶에 대한 슬픔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은주나 정다빈의 죽음은
아직 꽃피워 보지 못한 젊은 청춘의 죽음이었다.
나는 이미 그런 청춘의 나이는 아니니
젊은이의 초상이라는 제임스 딘의 죽음에 열광할 나이는 아닌 것이다.




지금은 억척 아줌마에
죽기 살기로 용쓰는 맹한 아줌마로 이미지화되고 있었던 그녀.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최진실은
아니지.. 내가 기억하고 싶은 최진실은
결혼이라는 인생의 걸림돌에 좌초되기 이전에 해맑게 웃던 그녀다.

<당신의 축배>였던가?
제목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오랜된 드라마에서 김무생의 막내딸로 나와
깜찍한 외모와 통통 튀는 연기로 내 눈을 사로잡았던 그녀는
이후 삼성전자 CF에서 인기몰이를 하면서 스타가 되었다.
그녀가 그렇게 발랄한 매력을 뽐내던 시절,
나 역시 인생의 무게를 모르면서 인생을 번민하던 풋내기 학생이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 1위 자리를 지키고
드라마와 영화를 종횡무진 활약하면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았다.
그녀가 정상의 자리를 고수하고 스타로서 빛나던 시기에
나 역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면서 젊음을 누렸다.
<질투>니 <별은 내 가슴에>니 인기 절정의 드라마를 보기 위해 집으로 달렸던 날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아슬아슬한 애정의 향방을 지켜보면서
청춘의 열병에 같이 동참했던 날들.
인생이 줄곧 이렇게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내심 알면서도
미래를 알려 하지 않고 기꺼이 즐거워했던 날들이었다.



세기는 바뀌어서 2000년대를 맞았다.
그것은 더이상 지금의 자리에 머무를 수 없음을 뜻하는 동시에
나도 그녀도 영원한 청춘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2000년에 나는 삐그덕거리기 시작하던 회사를 그만두었고,
그녀는 하든 안 하든 후회한다는,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 속으로 기꺼이 편입되어 들어갔다.

물론 사랑하니까 결혼한 거다.
하지만 그녀가 20대 청춘이었다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고,
그래서 결혼은 세월과의 타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녀는 스타의 삶이 아니라
여자의 삶을 살아야 했다.
제아무리 스타라도 비껴갈 수 없는 엄연한 현실.
남편의 외도, 폭력, 
상처받은 자존심과 모성애 사이에서의 고통....



이후로 그녀는 더이상 스타 최진실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네 여인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사람의 여자요, 아이들의 엄마로 보여졌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녀가 연기를 잘하는 탤런트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내가
그녀의 연기를 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것은.
1박 2일 일정으로 놀러간 속초의 모텔에서
친구가 목욕탕에 들어간 사이에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드라마 <장밋빛 인생>이 방영 중이었다.
하얀 병원 시트 위에 누워서
그녀는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내게는 그것이 연기가 아니라 그녀의 진짜 설움이 북받치는 것처럼 보여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함께 눈물을 뽑아냈는데,
드라마 속 맹순이가 슬퍼서 운 게 아니라
최진실이라는 한 여자로서의 슬픔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10대 소녀는 많은 꿈을 꾼다.
20대의 청춘은 꿈의 반을 버리지만 그래도 아직 인생을 즐길 여유가 있다.
아직은 충분해 보이는 연료 탱크를 믿으며
이 정도라면 부산까지는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30대가 되면서 많은 것이 변하기 시작한다.
꿈을 꾸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다.
삶의 희망을 노래해도 마음 한구석에선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기분을 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모진 목숨을 부지하려고 한다.
그것은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

그 많은 거짓된 목표로도 자신을 속일 수 없었던 것일까.
삶이란 고단하고 힘들고 외롭다는 걸,
인생의 반을 살아봤지만, 남은 반생도 뻔히 달라지지 않을 거란 걸 깨닫는 순간
삶의 목적은 희석되고
죽음의 유혹이 덮친다.


* * *


세간에서는 악성 댓글이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한다.
물론 악성 댓글로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정적으로 그녀가 아주 많이 외로웠을 거라고
그래서 끝내 죽음을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어렸을 때부터 채워지길 소망했으나
끝내 충족되지 않았을 깊은 외로움이
결국 삶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아닐까.

사람은 외롭다.
외로운 존재다.
친구가 있어도
가족이 있어도
남편이 있어도
아내가 있어도
자식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고독한 존재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살 만한 구석이 있다면
비빌 언덕이 있다면
그래도 또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다.

마치 오랫동안 안면이 있던 친구를 잃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성공, 웃음, 눈물, 고통..
기나긴 삶의 행로를 지켜보면서
나처럼 그 친구도 그렇게 그렇게 세월을 먹겠거니 믿었던 친구가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훌쩍 등져버린 것 같은 충격과 일말의 자책감.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녀는 작은 비빌 언덕을 찾지 못했던 것일까.
세상 모든 곳이 송곳처럼 뾰족한 가시풀밭이었을까.

항상 나오는 말이지만,
결국 타인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두 공범자다.
그래서 늘 죽은 이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죄스러운가 보다.

부디...
죽어서라도 그 영혼이 평안하게 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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