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홍차카페를 드나들면서
이리저리 다른 사람들이 올린 글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좀더 맛있는 홍차 마시기'에 골몰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기본적인 다구와
기본적인 홍차와 설탕과 우유 등을 갖추고
곁들여 간식거리까지 챙겨놓고도
여전히 뭔가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궁리들이나 남의 레시피를 읽어보는 과정이 행복하고 즐겁다.
행복하고 즐거우니
당연히 티타임은 즐겁고 기분 좋은 시간이다.
몇 분 동안 기울이는 정성의 끝에는
내 코와 눈과 입을 즐겁게 해줄 기분 좋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으니
기다리는 시간도 마냥 행복하다.

지금도 충분히 맛있고 즐겁지만
그걸로도 만족하지 못해
다른 사람들의 홍차 즐기는 법을 열심히 들여다보면서 나도 해봐야지, 하고
결의를 굳힌다.
누구는 시나몬 가루를 넣는다고 하고
누구는 생크림을 넣어 먹는다고 한다.
누구는 무슨 차에 무슨 밀크를 넣고 어찌어찌 해서 마신다고 한다.
누구는 시럽을 넣고, 누구는 꿀을 넣고
단맛을 내는 것도 가지각색이어서
저마다 자신만의 레시피로 즐거운 티타임을 갖는다.

생각했다.
'아, 생크림을 넣고 시나몬을 넣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즐기는 것은 홍차랑 커피랑 같구나.
하긴 커피도 원래 블랙도 있고,
설탕만 넣어서 마시는 것도 있고,
우유를 넣어 마시는 밀크커피도 있지.
개인 취향에 따라 시나몬도 뿌리고 초콜릿 가루도 넣고.'
생각해보니 홍차든 커피든 유럽인들은 스트레이트가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자기 입맛에 맞도록 다양한 레시피를 연구해서 맛있게 즐기는 법을 개발했던 것 같다.
꼭 원칙이나 한 가지 룰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어떤 방법으로든 그 차를 즐길 수만 있으면 그게 가장 좋은 레시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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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문득 '녹차'를 한번 되돌아봤다.
사실 녹차의 향은 풀 냄새 비슷하고
맛도 풀맛이 강한 편이고
어딘가 단맛과는 거리가 멀고 떫고 살짝 쓴맛이 돌기 때문에
그토록 엄청나게 마셔댔건만 도저히 녹차를 사랑할 수가 없었다.
'녹차'라고 하면 항상 소박하고 경건하고 깨끗하며 순수하고 맑아야 한다는
주입된 이미지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명상과 겸허, 경건을 수반하는 듯한 분위기의 '다도' 이미지 때문에
식탁 앞에서도 즐겁게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내 분위기와도 전혀 맞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
하나같이 녹차용 다구들은 절대로 사고 싶지가 않은 것인지....
백자나 청자, 소박의 극치인 도기 스타일 녹차 다구들은,
심플, 모던한 스타일, 엘레강스 스타일, 화이트톤의 깨끗한 스타일,
로맨틱한 스타일, 고전적인 스타일, 고딕 스타일, 큐티 스타일 등
다구 자체의 다양한 멋과 아름다움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커피잔이나 티잔과 달리
왜 그리 천편일률적이더란 말이냐!!!!!!!
(지금까지 서양식 테이블웨어나 티웨어 수집에 심취하는 주부들은 많이 봤는데
녹차 다구 수집에 열 올리는 사람은 별로 못 봤다. -_-;;
그냥 하나 정도 장만은 했을지언정
이것저것 수집가를 끌어들이기엔 역부족인 듯)

어쩐지 정갈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나무 좌탁에 앉아서 덕담이나 나누면서 조용조용 마셔야 할 것 같은 분위기를 강조하는 녹차는
사실 '맛'보다는 '건강'으로 승부해서 생활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녹차는 몸에 좋아, 녹차는 몸에 좋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이제는 거의 세놰 단계에 이르러
녹차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회사에선 하루 두세 잔의 녹차를 기본으로 마셨을 정도니까.
그런 만큼 녹차의 농약성분 파동이 났을 때 충격도 엄청났을 것이다.
"몸에 좋은 줄 알았더니 지금까지 농약을 마시고 있었던 거야??"
대부분의 반응이 이랬다.

결국 뭔가를 즐기는 문화보다는
목적을 위해 참고 견디고 인내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인 문화의 단면,
즐기는 것은 천박한 것이라는 사고의 경직성이
동서양의 차 문화만 들여다봐도 보이는 것이다.

녹차 못지않게
"몸에 좋지 않아, 몸에 좋지 않아"를 귀가 닳도록 들어서
이 역시 세뇌의 수준에 이른 커피는
그럼에도 여전히 엄청난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왜????
커피의 향이,
커피의 맛이,
예쁜 티웨어들이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원두를 좋아하는 사람은 원두커피로,
원두가 싫으면 인스턴트 커피로,
부드러운 밀크와의 조화를 좋아하면 밀크커피로,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얹은 비엔나커피로,
보드카를 넣은 러시안커피로,
캐러맬을 넣은 커피로 등등..
다양한 맛의 세계가 우리를 유혹한다.
커피를 끊지 못하는 건 '카페인 중독' 탓이라고 말하는 건
매사에 제국주의를 논리를 내세우는 것과 다름없는 꼴통 같은 소리다.


녹차는 변해야 한다.
'건강'이 아니라
더 즐겁고 맛있게 행복하게 녹차를 즐길 수 있도록,
그리고 다양한 맛을 연출하는 레시피에 빠져들수 있도록 변화할 필요가 있다.
그럼 더이상 녹차가 아니라고?
'동양인'과 '서양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은 동양인이냐, 서양인이냐...
뭐 이런 논린데,
그것은 얼핏 본질을 거론하는 질문 같지만
개념의 장벽에 눈이 멀어 진짜 본질을 보지 못하는 오류일 뿐이징~

어쨌든, 이번 주말엔 녹차에 꿀을 넣어서 한번 마셔봐야겠다... (이상한 맛일까? -_-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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